작성일 : 13-08-20 13:05
[서체] 궁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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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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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체 [宮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한글을 인쇄하기 위하여 한자의 전서체(篆書體)를 본뜬 한글 서체를 사용하는 한편, 필사(筆寫)의 경우는 해서체(楷書體)를 따라오다가, 17세기 말경부터 한문의 초서체(草書體)와 비슷한 흘림글씨체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대개 글씨의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한문의 서풍(書風)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이것이 차차 한글의 특수한 글씨 모양에 알맞은 서체로 발전하면서 정서(正書)에서 새로운 틀이 생기고, 흘림체에도 뛰어난 시각미(視覺美)를 갖춘 독특한 궁체가 형성되었다. 글씨의 선이 곧고 맑으며 단정·아담한 것이 특징인 궁체는 주로 궁중나인들에 의하여 궁중에서 발전하여 왔기 때문에 '궁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의식적(儀式的)인 등서체(謄書體)와 장식적인 서간체(書簡體)로 구별된다. 궁체를 잘 쓰는 현대 서예가로는 김충현(金忠顯)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六朝時代) 말, 양(梁)나라 무렵부터 당(唐)나라 초에 걸쳐 유행한 시체(詩體)를 궁체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5세기 말엽, 제(齊)나라의 경릉왕(竟陵王)의 사교장(社交場)을 중심으로 심약(沈約) 등에 의해 제창된 성률론(聲律論)에 의하여, 시가는 점점 그 운율을 갖추고 음악적 아름다움을 추구함과 동시에 용어도 또한 단 한 자라 할지라도 신기하고 유려하여,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문벌 귀족들의 취미에 영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풍은 양나라 때에 이르러 더욱 현저하게 되는데, 특히 문학을 좋아하던 간문제(簡文帝:재위 549∼551)는 황태자시절부터 서금(徐擒)·서능(徐陵)·유견오(庾肩吾)·유신(庾信) 등 문인을 불러들여 그들과 더불어 남녀간의 정을 소재로 한, 육체적 향기가 풍기는 시를 즐겨 짓고, 더욱 염시(艶詩)의 본령을 발휘하였다. 이 시풍이 황태자의 처소인 동궁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큼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궁체라는 말이 생겼다. 따라서 궁체란 동궁어소(東宮御所) 유행의 시체라는 뜻이다.
간문제의 작품 중 하나인 〈영만규(詠晩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珠簾向暮下(주렴향모하) 妖姿不可追(요자불가추) 花風暗裏覺(화풍암리각) 蘭燭帳中飛(난촉장중비) 何時玉窓裏(하시옥창리) 夜夜更縫衣(야야갱봉의) 간문제가 서능에게 편찬하게 한 《옥대신영(玉臺新詠)》은 이런 시의 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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