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일반자료실-서예일반 › 자료실 › 일반자료실-서예일반

 
작성일 : 13-08-20 11:35
[문방구] 벼 루 (중국)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990  
벼루 :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BC 202∼AD 8)의 벼루는 낙랑의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길이 약 21.8 cm, 가로 약 10.3 cm의 두껍지 않은 직사각형의 점판암으로 되어 있었고, 이것 외에 따로 지름 약 2.5 cm 크기의 석제 ·실린더라 할 수 있는 마묵구(磨墨具)가 곁들어 있었다. 벼룻돌에 먹가루를 놓고 교착제를 섞어 이 작은 숫돌과 같은 마묵구로 갈아서 묵즙을 얻었을 것으로 본다.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에는 먹이 분말에 아교질을 섞은 묵환(墨丸)으로 개발되어 이것을 갈기 위하여 원형의 석판 밑에 3개의 발을 만든 널판지를 받친 벼루가 만들어졌다. 허베이성[河北省] 왕두[望都]에 있는 후한시대 분묘의 벽화에 그 그림이 보이고 잔결(殘缺)된 실물이 낙랑에서 출토되었다. 육조시대(3~7세기)나 당시대(7~9세기)에는 주로 도연(陶硯)이 만들어졌으며 형태는 앞 부분이 둥글고 좁으며 뒤는 넓게 퍼져 풍(風)자를 닮은 꼴이어서 풍자연이라고 불리었다. 또 둥근 모양의 발이 달린 도연과 백자연도 있었다. 당나라 전성기에는 흡주석이 채굴되고 당나라 말기에 단계(端溪)의 연석갱(硯石坑)이 발견되면서부터는 점차로 석연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도하녹석(河綠石)은 송(宋) 이전에 이미 간쑤[甘肅]에서 채굴되었으나 송대에 이르러 석맥(石脈)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은 드물고 따라서 매우 고가이다.

송대(10∼13세기)에는 단계의 난가산(爛柯山)에서 양질의 석재가 채취되어 문인들에게 애호되면서 갑자기 연재의 으뜸으로 꼽혔다. 송대에 채취된 연석은 송단계라 불리며 지금도 귀하게 여겨진다. 진(秦) ·한(漢)의 고와당(古瓦當)을 가공하여 벼루로 만들었다든가 벼루의 둘레에 문자나 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청조(淸朝) 건륭시대(乾隆時代:18세기)에는 벼루의 형식이 대단히 복잡하여지고 의장이 섬세 ·교묘하여 화려한 것이 특징이었다.

흡주석(州石)은 안후이성[安徽省] 서셴[縣] 용미산(龍尾山) ·나문산(羅紋山) 일대에서 산출되기 때문에 용미연이라고도 한다. 석질은 점판암으로서 빛깔은 청흑색 ·청색 ·황색 등 여러 색이 있으며 청흑색의 것에는 용미연과 그물 같은 무늬가 있는 나문연이 있다. 이 밖에도 대모석(玳瑁石) ·미자석(眉子石) 등이 산출되며 어느 것이나 알맞게 단단한 봉망이 밀립하여 발묵(潑墨)이 매우 좋아 옛부터 단계석과 더불어 귀중히 여겨진다.

단계석(端溪石)은 광둥성[廣東省] 가오야오현[高要縣]의 난가산(爛柯山)의 계곡에서 산출된다. 당나라 때부터 채굴되었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 더욱 문인들이 애호하였다. 암질은 휘록응회암, 빛깔은 자색 ·저간(猪肝)색 ·청색 ·흑색 ·녹색 등이 있으나 자색과 저간색이 많다. 단계석(端溪石)의 특질은 다른 돌에 비하여 봉망의 단단하기가 먹을 가는 데에 적당하여 온(溫) ·윤(潤) ·유(柔) ·눈(嫩) ·세(細) ·니() ·결(潔) ·미(美) 등 팔덕(八德)을 갖추어 벼루로서의 기능 이외에 감상의 대상으로도 진중된다.

징니연(澄泥硯)은 강물 속에 침전된 고운 진흙을 정선하여 틀에 넣어 굳혀서 구워낸 인조연이다. 당나라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돌보다도 오히려 견고하고 봉망이 밀립하여 발묵이매우 잘 된다.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로85번길 1 (대의동), 명성빌딩 4층
대표 : 062)222-4155 FAX : 062)222-4156
Copyright(c) hagjeong. All right Reserved. Mail to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