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20 13:16
[일반] 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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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6,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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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백 [飛白]
글씨의 점획이 새까맣게 씌어지지 않고 마치 비로 쓴 것처럼 붓끝이 잘게 갈라져서 씌어지기 때문에 필세가 비동(飛動)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창시하였다고 전해온다. 한(漢) ·위(魏)시대의 궁전 제액(題額)에 이 서체가 쓰였으며, 후한 때에는 장지(張芝)가 일필서(一筆書)의 비백을 썼다 하고 위나라의 위탄(韋誕), 진(晉)나라의 위항(衛恒)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등도 모두 비백체의 명수였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남송(南宋)의 포조(鮑照)가 ‘비백서세명(飛白書勢銘)’이라는 글을 지어 이 서체의 아름다움을 일컬은 것을 보면 그 무렵에 훌륭한 비백의 작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齊) ·양(梁)시대에 유행한 잡체 속에는 이 서체가 포함되어 있다. 제나라 소자량(蕭子良)의 ‘전례문체(篆隷文體)’에도 이 서체가 잡체의 일종으로 도시(圖示)되어 있다. 양나라의 소자운(蕭子雲)은 소(蕭)자를 이 비백체로 벽서(壁書)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唐)나라 때는 태종이 이에 능하여 가끔 신하에게 써주기도 하였다.
태종의 《진사명제액(晉祠銘題額)》, 고종의 《기공송제액(紀功頌題額)》 《효경황제예덕기제액(孝敬星帝睿德記題額)》,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승선태자비제액(昇仙太子碑題額)》 등은 모두 비백체로 쓴 현존하는 유적들이다. 대영박물관 소장의 둔황문헌[敦煌文獻] 속에도 이 서체로 제액을 쓴 고본(稿本)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나라 때의 유법이다. 송(宋)나라 때는 인종(仁宗)이 제1인자로 꼽혔으며 명(明) ·청(淸)시대 이후에는 문인 묵객들이 감상하며 즐겼고 청나라의 육소증(陸紹曾)은 비백에 관한 문헌을 모아 《비백록》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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